; 본문 바로가기

# 담백씨의 기록/문화생활& 건강@

[추억 # 1] 그 곳에 내가 있었다...

아침에 길을 나서다 아이들을 본다.

교복에 책가방을 매고 학교로 향하는 것일 아이들. 발길은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고들 있지만 다들 핸드폰을 들여다 보느라 고개가 숙어 있다.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아이들을 쳐다보면서 새삼 내 모습을 상가 유리창에  비추어 본다. 저 아이들도 나름 학교 다니느라 힘들겠지...싶다가  " 아이고 나만큼이나 했을라고..."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래... 나 참 그때 힘들었었다.








추억이 아름답기만 할까...


어깨가 끊어지도록 무거운 책가방을 매고 등굣 길에 오를라면 깊은 한숨이 먼저 나오던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당시엔 국민학교라 불리웠는데...) 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집 앞이 아닌 버스를 타고 몇 정류장은 가야 하는, 그런 곳에 중학교를 배정받는 아이들도 많았으니 당시엔 좀 거리가 떨어져 있다해도 별다른 일이 아니였다.


문제는 중학교를 입학하기도 전에 우리 집이 이사를 했다는 거다.

교통편이 많지도, 길이 좋지도 않던 시절. 버스 안내양이 아직까진  있었던 그 시절.

아침 저녁으로 학생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강제로 자율학습이 행해지던 그 시절.


여고와 여중이 함께 있던 중학교는 버스에서도 내려서 한참을 골목길을 따라 길을 걸어서야 그 입구가 보였다.

골목 끝자락에  그 동네를 뒤로 감싸고 있던 산이 있었는데 그 뒷산 중턱!!에 떡하니 학교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에휴~~ 말로만 듣던 산등성이에 있는 학교. 지금도 생각하면 ... 식은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흐른다.


초등학교 졸업도 전에 다른 도시로 이사를 한 나는 배정받은 중학교에 그냥 다녀야 하는 걸로만 알았다.

우리 부모님도 전학이란 걸 생각지도 않으셨으니... 

나도 전학이란 걸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으니 말 다했지 뭔가.


새벽  6시 전에 무거운 책가방을 어깨에 매고 도시락 2개를  들고 집을 나서서 버스를 타고 매일 학교에 갔다.

아침 버스는 출퇴근하는 어른들과 학생들과 일을 나가는 사람들로 언제나 만원이었다. 지금처럼 버스가 자주 있지도 않았다.

학교를 갈 수 있는 버스가 오면 자그마한 몸을 이끌고 이리저리 뛰었다. 항상 만원인 버스에 발 하나를 겨우 걸친 상태에서 안내양이

나를 밀어 넣었다... 앞문에, 뒷문에 겨우 매달려 가길  수도 없이 했다. 행여나 차에서 떨어질까봐 얼마나 힘주어 두손을 움켜 잡았던지 나중엔 두 손의 감각이 없는 적도 많았다.


거기서 끝~이였으면 그나마 좋으련만.

마지막 죽음의 코스가 남아 있었다. 나에겐 정말 죽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죽음의 산비탈 오르기!!

체구도 작고 운동신경은 애초에 태어날 때 부터 없었던 나. 체력 검사라도 하면 모두가 '미달상태'인 나였다.

등교 첫날, 난 이 죽음의 코스를 생각해서 등교시간을 넉넉히 잡고 집을 나섰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첫날 지각은 면했으니 말이다.


학교는 길다랗게 뻗은 시멘트 길을 따라 꼬불꼬불 가다보면 산자락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양쪽으로는 말 그대로 나무들이 우거진 산...이다. 비틀진 각도가 어마어마하다. 

5분 가다가 쉬고, 5분도 채 못가고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 곱게 깔아진 시멘트 길로 올라가지 못했다. 가로수 처럼 늘어서 있던 나무둥치를 잡고 올라가야 했으니... 뭐라도 잡고 한껏 뒤로 빠진 몸뚱이를 앞으로 잡아 끌어 올려야 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길때마다 입에서 숨이 몰아져 나왔다. 호흡이 망가지니 수도없이 숨이 모자라 기침도 나고, 얼굴과 두 눈은 점점 빨개져 갔다. 눈물이 솟은 두 눈은 눈물로 그렁그렁, 콧물도 쉴새없이 흐른다. 자꾸 기침하느라 배에  힘을 주니 배도 꼬였다. 구역질도 올라온다. 으웩으웩....

산을 오르다 말고 풀 숲으로 들어가 토를 해댔다. 산을 오르며 교실에 도착할 때까지 대여섯 번의 구토를 했고, 결국 교실 내 자리에 앉았을 때는 이미 온몸의 기력이 다 빠져서 정신마저 몽롱한 상태였다. 그렇게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몸약한 아이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아예 아침을 먹지 않게 되었다. 그래야 그나마 속이 편했으니까.


새로운 친구들, 선생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은 이렇게 "무서운 산타기" 에 밀려 났다.

몇 달 동안 다리가 엄청 아펐다. 엉치뼈가 아프던 것이 무릎으로, 발목으로, 발꿈치로, 나중엔 발가락 마디마디 뼈가 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바닥을 제대로 디딜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은 지금 나에게 나쁜 습관으로 남아 있다. 내가 발뒤꿈치로 디디고 앞발바닥은 조금 들고 걷는다고들 한다.  침도 맞고, 약도 먹었지만 쉽사리 낫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 시절 나의 기억은 힘듬으로 가득했다.

난 이 학교가 싫었다. 끔찍했다. 아, 난 이제 죽었다 싶었다.

.

.

.

당시엔 학교에서 정규 수업이 끝나고 나면 자율학습이란 걸 했다.

우리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경기도 지역은 다 했던 걸로 안다.

지금도 어떤 학교는 자율학습을 시키고, 어떤 학교는 안한다고 알고 있다.

저녁 9시에 끝나고 나면, 버스 시간 때문에 뛰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야했는데,

학교 앞에는 그 버스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간 뒤 서울행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매번 막차를 놓칠까봐 전전긍긍 했고.

집에 도착하면11시가 거의 다 되었다. 밤중엔 차들이 엄청 내달리기에 그나마 저 시간에라도 집에 들어갔으니.


여름 장마철엔 더 등하굣 길이 험난하다.

겨울 흰눈이라도 내리면 더 고역이다.

얼음판에만 서면  마비가 되어버리는 두 다리 때문에, 나는 완전한 거북이가 된다.

무서워서 얼음 위를 지치지 못하니, 게 걸음도 아닌 뒤뚱거림으로 겨우 겨우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시간은 배로 걸리고

온몸의 근육이 다 뭉친다.

그 눈덮인 산비탈이 나를 그냥 놔둘리 없었으니... 손목을 삐고, 발목을 접지르고, 구르고. 나의 겨울은 온통 성처투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은 아련하다...


신기하다!!!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갔다. 

첫 등교에 1시간은 족히 걸어 올라갔던 산타기(?)가 어느새 조금씩 익숙해져 가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번만 쉬고도 올라갈 수 있고, 친구들과 수다라도 떨라치면 한 번도 안 쉬고도 그냥

쭉~ 올라갈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15분이면 충분했다.  오르는 시간이 이 정도였으니 내려오는 길은 정말 식은 죽 먹기마냥 아무 일도 아니였다. 한달음에 산비탈을 내달려 뛰어내려 오다보면 여름엔 시원한 산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흘러내린 땀방울을 거두어 주고, 한겨울엔 반짝이는 햇살이 흰눈에 반사되어 빛무리를 내뿜어 준다. 그 청명하고 서늘한 흰빛깔 속에서 수많은 결정체들이 반짝거린다. 아...이쁘다 ...란 탄성이 절로 나온다. 계절마다 변해가는 나무들의, 꽃잎들의 푸르고, 울긋불긋한 빛깔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이것처럼 아름다운 색감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쌍여갔다. 


내리 그렇게 3년을 이 산 중턱에 있는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재단에 고등학교도 같이 있었기에 거의 모든 동기들이 그 곳으로 진학했으나, 나는 내가 사는 지역의 고등학교에 시험을 보고 진학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학교와 이별을 했다. 


3년 개근상도 탔다.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고, 또 나를 그렇게 건강하게 담금질해 주었던 학교.

그 곳에서 나는 몸도 마음도 생각도 자랐다.

그 학교는 지금도 여전히 그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나 같은 학생도  또 있을 것이고!